「인간 실격」에서 신뢰라는 것은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예전에 MSN 대화명으로 "속는 사람이 바보인 것이 아니라 속이는 세상이 나쁜 거다."라고 적었다가 '아직 어리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내 마음을 짓밟는 일이 또 생기더라도 계속 사람을 믿는 쪽이 강한 거라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내가 상처받아도 다시 믿는 것이 누구도 믿지 않는 것보다 나를 밝은 길로 걷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직소」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다에 대한 깊은 동질감이었다. 나는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처럼 행동할 수 없을 테니까. 유다도 하나님께서 필요로해서 준비되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부디, 하나님께서 저를 유다의 역할로 준비하지 말아주시기를. 욥처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손모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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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니까요. 남을 의심할 줄이라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버렸습니다.
(「인간 실격」세번째 수기 2, 117쪽)
(전략) 아내는 그녀가 지녔던 귀한 장점 때문에 능욕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장점이라는 것은 남편이 예전부터 동경하던 순결무구한 신뢰심이라는 한없이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인간 실격」 세번째 수기 2, 119쪽)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나가도 저는 여전히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이마에 찍혀 있겠죠.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실격」세번째 수기 2,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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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알아주시지 않아도, 또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당신만 알아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런 것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직소」144쪽
그 전에건 그 후에건 그분하고 차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고 그 뒤로는 결코 저한테 마음을 열어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 그분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테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 거야. 그 사람을 남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그전에 내가 죽여버리겠어. 아버지를 버리고, 어머니를 버리고,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나는 오늘까지 그분만을 쫓아다녔어. (중략)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은 믿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이 세상에 없어. 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어. 그뿐이라고.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아. 그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천국이 가까워지면, 멋들어지게 총리나 부총리가 되어보려는 치사한 마음도 없어. 나는 다만 그 사람을 떠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단지 그분 곁에 있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이 설교 따위는 그만두고 나하고 단둘이서 평생 오래오래 살았으면 싶은 거야. 아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지금 현재의, 이 현세의 기쁨만을 믿어. 다름 세상의 심판 따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아. 그 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나의 이 순수한 사랑을 왜 받아주시지 않는 걸까? 아아, 그 사람을 죽여주세요. 나리.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압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멸시하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움받고 있습니다.
「직소」145~7쪽
이제는 지체할 때가 아니다. 그분은 어차피 죽는 거다. 다른 사람 손으로 하급 관리들한테 넘기느니 내가 그 일을 하자. 오늘까지 내가 그분에게 바쳐온 외곬 사랑의 마지막 도리는 이것이다. 내 의무다. 내가 그분을 팔아넘기겠다. 괴로운 입장이지. 누가 나의 일편단심에서 우러나온 이 사랑의 행동을 정당하게 이해해 주겠는가. 아니,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야. 남한테 이해받으려는 사랑이 아니야.. 그런 치사한 사랑이 아니야. 나는 영원히 남의 미움을 사리라. 그렇지만 이 순수한 사랑의 욕망 앞에서는 어떤 형벌도, 어떤 지옥의 업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관철하겠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직소」155쪽
가엾게도. 저분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신 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에 저는 갑자기 강렬하게 오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그분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싶어졌습니다. 오오, 불쌍한 분. 당신을 처벌받게 할 수는 없어. 당신은 늘 다정했어. 당신은 언제나 올발랐어. 당신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저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팔아넘기려고 이삼 일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직소」156쪽
『인간 실격(人間失格,1948)』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옮긴이 김춘미
펴낸곳 (주)민음사
1판 1쇄 찍음 2004년 5월 10일
1판 1쇄 펴냄 2004년 5월 15일
ISBN 89-374-6103-x 0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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