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시간에 몸을 맡겨 흘러가다가 소중한 것을 잃고나서야 얻는 것이 성장이라면 난 그냥 멈춰서는 편을 택할래. 그런 식으로 자라는 일 따위 숨막혀.
아마도 세상에는 별로 말이 없어도 용서받는 타입과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고 있어야만 하는 타입의 두 종류가 있는 게 아닐까. 계속 떠들고 있는 동기는 서로 다르지만 이나가와 씨와 나는 명백히 후자 쪽에 속했다.
내가 언제나 조용히 지낼 수 없었던 것은 그러지 않으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거나, 붙임성이 없다는 말을 듣거나, 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경원시되거나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일 없는 미노우라 씨가 부러웠다.
(재의 도시에 사는 그것들, 150쪽)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지요.
(검붉은 얼룩의 승자, 315쪽)
나는 누나를 안은 채로 조심스레 일어섰다. 누나의 몸은 가벼웠다. 그것도 너무나 가벼워서 나는 울었다. 울면서 나는 돌아가자, 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다. 돌아가자, 지금이야말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재출발하는 것이다.
반쯤 열린 채로 있던 유리문에 누나를 안은 나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그 이마에 언제부터인지 검붉은 '얼룩 - 라 만차'가 생겨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다시 잘 보니 골프채를 내리쳤을 때 튀어 오른 피가 비와 땀에 얼룩져서 생긴 자국이었지만, 누나를 양팔로 안고 있는 나는 그것을 닦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얼룩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남아 영원히 나의 출신을 고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렇다면 그러라고 해. 나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고 유리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붉은 얼룩의 승자, 319-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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