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이바나』

이바나 - 4점
배수아 지음/이마고
 이바나라는 책은 읽는 내내 모래가 꺼끌거리는 밥을 목으로 넘기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배수아는 여기에 담아둔 두 문단만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사랑때문에 진흙탕을 맨발로 걸었던 기억이 났다. 배수아씨. 이거 반칙이야!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울고 싶어지는 이 글을 잊지 못하겠지.

11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고의적으로 말하기를 피한다.
 그것은 수치나 허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침묵에 복종한다. 그것은 강요당한 상태이다.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영혼'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말했지만, 사랑은 심장을 움켜쥐는 음악과 같다. 격정에 빠진 연인은 스스로 추방되기를 운한다. 사회나 제도, 결혼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은밀한 방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문을 잠근다. 거기 머문다.
 사랑이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날 때, 우리는 목욕탕에서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머리칼이 없다면 팔이나 혀를 자르거나 눈을 잃게 된다.
 고통에 대하여, 육체란 영혼보다 직접적이며 분명하게 말한다. 육체란 영혼의 언어이다. 영혼은 육체를 빌려 말한다.

 사랑이여, 베어나간 내 살이여.
 자신의 일부가 베어나가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단지 섬뜩함만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그런 섬뜩함만이 피부에 남아있다.


 사랑이 치명적인 것은 바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하다.
 우리가 늙고 죽음을 목전에 두어 더 이상 사랑에 대하여 아무런 희망이나 가능성도 꿈꾸지 않을 때, 그런 때에야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침묵.

47 두 사람의 사랑의 기록에는 암흑의 부분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서로 알 수 없었던 일들의 내막에 관하여 대화를 원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미 그들이 종말을 고한 뒤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지나간 다음에는 뒷모습이나 그림자, 혹은 발자국이나 마시다 남은 커피 잔이나 모자를 걸었던 자리 정도만이 남아있다. 두 사람이 무대에서 동시에 사라지는 일은 거이 없다. 이럴 때 개인은 갭려적인 우주가 되어 고유한 잣니만의 시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각자의 시차는 어쩔 수 없다.
 은밀한 방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모자를 고쳐 쓰고 바람 부는 좁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그는 사라지는 것말고 어떠한 일도 할 필요가 없다. 혼자 남아있는 나머지 사람이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지상의 가장 고독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 은밀한 방에서 홀로 남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도 알 수없다. 이윽고 두번째 사람이 걸어나온다. 그는 문을 잠근다. 그들의 사랑을 감금한다. 지나간 시간은 유령이 되어 그들의 비밀 안에 머문다. 그러므로 두번째 사람은 유령과 동침의 시간을 갖는다.

『이바나』
지은이 배수아
펴낸곳 이마고
ISBN 8995266406

@2005년 6월 20일
2005/07/08 01:04 2005/07/08 01:04
프리니

다나베 세이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 6점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작가정신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제목에 이끌려 서점에서 전부 읽어버리고 말았던 책을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서 읽었다.

 책에는 9개의 단편이 들어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단편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였다. 커가면서 서로 사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얘기하지 않게 된 자매의 모습과 어른스러운 동생 미도리가 꿈꾸는 식물 같은 언니 고즈에를 내심 경멸하는 모습이 내 상황이랑 잘 맞는듯해서 잠시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나는 고즈에와는 여러 가지가 다르긴 하지만 동생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모습인 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었다.
현실에 한쪽 발만을 디딘 채 항상 환상을 잡으려 손을 뻗었던, 지금도 뻗고 있는 내 모습이 고즈에와 겹쳐져 견딜 수가 없다. 단편 끝에서 고즈에는 웃으며 동생의 결혼 상대와 얘기를 하지만 그곳은 계속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나도 내가 계속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웃기만 하며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조제가 츠네오에게 하는 이 말 하나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 되었다. 소설의 츠네오는 영화와는 달리 조제를 떠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났더라도 조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본 지금이 더 행복할 테니까.

@2005년 5월 11일

옮긴이 양억관
펴낸곳 작가정신
초판 1쇄 발행일 2004년 10월 15일
2005/07/06 02:07 2005/07/06 02:07
프리니

미우라 아야코 『길은 여기에』

길은 여기에 - 8점
미우라아야코 지음, 진웅기 옮김/범우사
부전공인 일본어 수업 중에 미우라 아야코의 『光あるうちに』를 배운 날에 『빙점』을 읽었던 때의 느낌이 그리워져서 학교 도서관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책 몇 권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었다.

끔찍하게 절망적인 투병생활, 그리고 그동안의 여러 사람과의 교제 - 아픈 몸으로 두 명과 약혼하고, 누워서 움직일 수 없으면서 고백을 받는 그녀를 보니 역시 연애라는 건 매력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 확인했다; - 그리고 기독교 입교.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결혼하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담은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했던 부분은 다다시라는 사람의 존재였다.

세상에 천사는 있다. 다다시가 세상에 존재했었으니까. 전염성이 강한 환자의 타액이 묻은 휴지가 든 휴지통을 뒤져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려 노력해주는 사람. "당신이 잘못되게 막는 힘이 내겐 없다."라고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 죽기 전에 그녀의 미래를 막지 않도록 손을 놓아주는 그런 사람. 그라면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 텐데.

다다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생각하기 전에 다다시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어린 생각부터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8년 만에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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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범우사
1976년 11월 1일 초판발행
1991년 5월 30일 개정 9쇄발행


2005년 5월 3일
2005/07/06 01:50 2005/07/06 01:50
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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