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씩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여전히 헐리우드의 영화를 보고 웃거나 울곤 한다. 그런 미국 헐리우드의 문화를 이끄는 만화 영웅들. 예전에 TV에서 해줄 때 열심히 챙겨봤던 배트맨, 영화 보면서 울었던 슈퍼맨. 하지만 지금은 어렸을 때처럼 볼 수 없다. 어렸을 때처럼 무작정 받아들여서도 안되고.
만약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먼저 보지 않고 『지구영웅전설』을 먼저 봤다면 나는 박민규 씨의 소설을 더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책장은 잘 넘어가는데 설명하기 어렵지만 따끔따끔하다. 이성애자 남성의 한계?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예민한 사람이었나보다. 『카스테라』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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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꿈도 꾸지 마."
슈퍼맨은 한마디로 나의 얘기를 일축 했다.
*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정의를 모르는 나쁜 무리들과 바나나맨의 탄생, 46-7쪽)
"축하해. 이제 자넨 영웅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이게 현실일까?" 내가 소리쳤다.
"물론."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정의를 모르는 나쁜 무리들과 바나나맨의 탄생, 53쪽)
"그래, 힘! 힘은 곧 '정의와 같은 것이란다. 소련의 가장 나쁜 점이 무엇인지 아니? 더럽고 추잡한 빨갱이들의 사상? 아니, 그건 두번째에 불과해. 뭐니뭐니해도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건 나와 맞먹는 힘을 가지려 드는 것이란다.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지."
"서로 의논을 해보는 건 어떤가요?"
"절대 안 돼. 그건 타협의 문제가 아니란다. 왜? 내가 가진 힘을 한번 생각해보렴. 그건 이 지구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나 외의 존재가 그런 힘을 가져서는 안되는 거야. 나라면 안심할 수 있지. 왜? 내가 곧 이 세계의 '정의'니까."
"그렇군요."
"이제 '정의'의 실현이 어떤 것인지 좀 알겠니? 그건 결국 지구 전체를 주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란다. 즉 썩는 사과가 하나도 없는 거대한 사과상자를 가지는 것이지."
"만약 그래도 썩는 사과가 생기면요?"
"싸워 무찔러야지."
(슈퍼맨, 용감한 힘의 왕자, 68-9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여객기의 모습에서 언뜻 당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폭발력도 당신의 힘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하겠지만, 뭐랄까 그래서 저는 그 무모함의 근원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남아있는 '나쁜 무리'들은 분명 당신을 닮아가고 있으며, 또 일종의 내성(耐性)마저 생기는 게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평범한 인간인 그들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심어준 것일까요. 잘은 몰라도, 저는 그것이, 당신이 너무 '슈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당신은 너무 슈퍼합니다.
(슈퍼맨, 용감한 힘의 왕자, 73쪽)
"리들러(RIDDLER)라고 알지?"
"물음표맨? 그 악당을 말하는 거야?"
"그래...... 배트맨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야."
"부류? 놈은 혼자잖아."
"아니, 이 세상엔 상당수의 리들러들이 있어. 그들은 모드 '의혹'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즉 이 세계의 '정의에 대해서 말이야." 웨인은 리들러들을 용납하지 않아. 만약 누군가가 리들러임이 탄로났다면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
"그럼 로빈은......"
"그래, 나는 사실 리들러야.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충고하는 거야. 넌 절대 '의혹'을 가지지 마. 이 세계의 의혹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배트맨 로빈, 정의의 용사, 88쪽)
지구영웅전설
지은이 박민규
펴낸곳 (주)문학동네
초판인쇄 2003년 6월 12일
초판발행 2003년 6월 20일
ISBN 89-8281-679-8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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